요즘 같은 잠도 오지 않는 여름날엔 긴 호흡의 소설을 읽는 게 좋다.
두번째 읽는 김연수 작가의 소설이다.

그의 소설은 추리소설 같다.
주인공들이 자신을, 혹은 자신의 내면을, 또는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는 형식의 추리소설이다.

카밀라, 또는 정희재

그녀가 누구인지를 찾는 여행,
그 차디차고 검은 심연을 건너가는 날개를 달아보았다.


작가의 글들 중에 인상적인 부분을 남겨본다.




- "고양이 작은 발로 안개는 온다.

묵묵한 엉덩이로 앉아 항구와 도시를 바라보다가.."라며 칼 샌드버그의 [안개]를 읊고 있었다...

그 다음은 마지막행인 '이윽고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였는데, 좀체 그 부분을 읊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그를 힐끔거리다가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왜 뒷부분을 마저 읊지 않나요?"

어색한 마음에 내가 물었다.

" 안개에게 항구와 도시를 충분히 바라볼 시간을 줘야죠..


- ..눈동자 속에 숲으로 가는 길이 있다 너의

시선 속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는 새벽이 있다..


- 나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찌른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가느다란 핏줄기를 상상했다. 미생물과 박테리아와 수생식물과 민물고기들이 떠다니는 검은 물속으로 가느다란 선처럼 붉은 피가 흘러나오다가 서서히 흩어지는 광경을. 곧 닥칠 죽음의 공포를 경감시키기 위해 뇌 속으로 분비된 화학물질의 작용으로 물속의 여자는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건 실타래가 풀리듯 모든 인습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듯한 느낌이었겠지. 수초처럼 흔들리는 검고 긴 머리칼,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두 눈동자, 마침내 수면을 향해 올라가는 마지막 숨결의 공기 방울들..... 그렇게 여자는 죽고 국가는 그 마지막 피가 마치 첫경험의 피인 양 기뻐하며 열녀비를 세운다.


- 공기속에서 물성이 느껴졌다 그건 책의 기운이었다..


-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 혹은 줄여서 '우리사이'


- 서울출신인 그녀와 진남 출신인 그는 서로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다툰적이 많았다. 

.. 말다툼 끝에 그는 "그래, 내가 늘 오해한 거야. 정말이지 늘 오해한 사람이 바로 나였어"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날 오해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날 어떻게 오해했다는 거야?"라고 되쏘았다는 것이다. 

.. 자신들이 멍청하게도 사투리 때문에 헤어진다는 사실을. 자신은 '늘'이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널'이라고 알아들었다는 것을. 그녀는 고양이의 말까지 알아듣는 사람인데, 남자친구의 사투리만은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 그제야 사투리 때문에 헤어지는 연인이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날카로운 깨달음이 여기 폐와 위장 사이에 꾹 박혀 늑골을 쑤셔대는 것 같습니다...


-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왠지 서른살은 그렇게 맞이해야만 할 것 같아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가, 어쩌면 그 사람처럼 자기를 버리고 떠난 여자를 찾아서 낯선 나라를 헤매다가 어느 밤 갑자기 자기가 늙어버렸다는 걸 깨닫는거지. 그런 느낌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삼십 대를 맞이하겠니?"


- 사랑했지만 가지지 못한 것만이 진짜야..


- 가끔,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나의 말들이 심연을 건너 당신에게 가닿는 경우가 있다. 소설가는 그런 식으로 신비를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신비를 체험한다. 두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을 때, 어둠 속에서 포옹할 때, 두개의 빛이 만나 하나의 빛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듯이.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우리가 두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것, 혹은 당신이 내 소설을 읽는 것, 심연 속으로 떨어진 내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작가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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